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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달팽이의 회고록>의 껍질 속 삶, 인생의 고난, 창작의 힘

by kor-info 2025. 5. 6.
목차
1.껍질 속 삶
2.인생의 고난
3.창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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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달팽이의 회고록> 포스터

1.껍질 속 삶

영화 '달팽이의 회고록'을 보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스톱모션이라는 아날로그적 기법으로 빚어낸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어쩐지 나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자잘한 상처들이 모여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낸 그 소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 알코올 중독자 아빠, 그리고 가장 큰 상처인 쌍둥이 오빠 길버트와의 이별. 달팽이의 회고록은 이런 아픔들을 덤덤하게 풀어낸다. 무거운데도 무겁지 않게, 슬픈데도 우울하지 않게. 영화관을 나오며 문득 내 어깨 위에 얹어진 무거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그레이스와 핑키 할머니의 관계다. 이웃집에 살던 괴짜 할머니는 누구보다 그레이스를 이해해 준다. 두 사람의 우정은 서로 다른 세대,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도 마음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달팽이 실비아를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는 그레이스의 독백도 가슴을 치는데, 이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 어떤 장면에선 가끔 울컥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지곤 했다. 영화 후반부, 그레이스가 자신의 달팽이 껍데기에서 용기 내어 나오는 장면은... 이건 꼭 봐야 한다. 그저 "내 마음속에도 달팽이가 살고 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2.인생의 고난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던 날, 우연히 달팽이의 회고록을 봤다. 그레이스의 삶은 내가 경험한 그 어떤 불행보다 가혹했다. 영화는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불행의 연속이었음을 보여준다. 구순구개열로 태어나 수술대에 오른 아기, 출산 중 세상을 떠난 엄마, 그리고 하반신 마비와 술에 의존하는, 그럼에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이런 시작부터가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가장 가슴 아픈 건 그레이스와 길버트가 서로 다른 입양 가정으로 보내지는 장면이었다. 서로를 의지하던 두 아이가 이별하는 순간,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상실감을 느꼈다. 그레이스의 새 집은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기괴한 분위기가 감돈다. 길버트는 종교에 집착하는 가정에 입양되어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간다.

영화는 학교에서의 따돌림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소외감, 그 씁쓸함이 화면 가득 묻어난다. 그레이스가 혼자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은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며 살아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달팽이의 회고록은 이런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핑키 할머니와의 만남은 그레이스에게 새로운 시작이 된다. 주변에 한 명, 단 한 명의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영화를 보면서 내 주변의 '핑키'는 누구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레이스'이면서 누군가의 '핑키'일지도 모르겠다. 

3.창작의 힘

달팽이의 회고록을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이 영화가 8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AI가 몇 초 만에 이미지를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에, 누군가는 7천여 개의 오브제를 손으로 만들고, 13만 장이 넘는 프레임을 하나하나 촬영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에 적힌 "This film was made by human beings"라는 문구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레이스의 아버지가 볼렉스 카메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장면들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술에 절어 사는 그도 창작하는 순간만큼은 살아있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왠지 코끝이 찡했다.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 이것이 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그레이스가 실비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되는데, 말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치유라는 게 와닿았다.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 그것이 비록 달팽이에게 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이해하게 되는 거겠지.

애덤 엘리엇 감독의 인터뷰를 봤는데, 그는 "완벽함보다 진정성"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달팽이의 회고록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진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은 정직하고 강렬하다. 손맛이 느껴지는 클레이 텍스처, 조금은 어색한 움직임, 그런 불완전함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내 안의 달팽이를 생각했다. 나는 어떤 껍질 속에 숨어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쯤 그 껍질에서 나올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달팽이의 회고록은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영화다. 때론 천천히 가는 것도,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