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세월의 무게
2.얽힌 운명
3.청춘의 상처
1.세월의 무게
어제 드디어 '파과'를 보고 왔다. 요즘 이런 영화가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신선했다. 60대 여성 킬러라니, 그것도 이혜영이 연기했다. 처음 티저 포스터를 봤을 때부터 기대가 컸었다. 레전드 킬러 '조각'의 삶은 40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깊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민규동 감독의 '파과'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비밀 조직 '신성방역'에서 수십 년간 활동해 온 노장 킬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제 보는 내내 이혜영의 연기에 압도됐다. 나이가 들어 과거의 명성만 남은 '퇴물'로 치부되는 현실과 마주하는 조각의 눈빛에서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영화 '파과'에서 그녀의 푸른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그 순간들이었다.
요즘 영화들과 달리 '파과'는 화려한 액션보단 감정선에 더 집중했다. 조각의 냉철하고 정확했던 킬러로서의 기술이 이제는 감정의 개입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자는 철칙을 40년간 지켜온 그녀지만, 영화 '파과'에선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에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이혜영의 연기는 단순한 액션을 넘어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표현해 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40년간의 고독과 살인의 무게, 그리고 이제는 노쇠해 가는 육체와의 싸움이 드러났다. 베를린영화제에서도 화제가 됐다던데, 진짜 대단한 연기력이다. 환갑의 나이에도 저런 액션을 소화하다니, 성룡이나 리암 니슨 못지않다. '파과'를 보고 나서 이혜영이라는 배우를 새롭게 보게 됐다. 어떤 면에서 '파과'에서 조각의 삶은 시간과의 싸움,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 같아서 더 공감이 갔다.
2.얽힌 운명
영화 '파과'의 또 다른 주인공은 김성철이 연기한 '투우'다. 이 캐릭터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출중한 실력으로 조직 내에서 인정받는 젊은 킬러 투우는 조각을 집요하게 쫓는다. 처음엔 단순히 조각을 제거하려는 킬러인 줄 알았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투우의 냉혹한 눈빛 뒤에 숨겨진 과거의 아픔과 집착이 드러난다. '파과'의 진짜 매력은 투우와 조각의 관계가 단순한 적대 관계를 넘어 깊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관계가 점점 명확해질수록 '파과'는 복수와 구원, 증오와 연민이 뒤엉킨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이끈다.
조각이 40년 동안 지나온 피의 역사가 투우의 삶과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은 이 영화의 큰 매력이었다. 김성철도 정말 연기를 잘했다. 복잡한 내면을 지닌 투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이혜영과 뜨거운 케미스트리를 보여준다. '파과'에서 두 인물의 대결 장면은 세대 간의 충돌과 함께 서로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선이 교차한다. 투우가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와 그것이 조각과 연결되는 방식은 '파과'의 중심 줄기로,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았다.
연우진이 연기한 강 선생과 김무열의 류, 그리고 어린 조각 역할의 신시아까지, 배우들이 정말 잘 어울렸다. 특히 '파과'에서 조각의 스승이자 그녀에게 모든 기술을 가르친 류의 존재는 조각의 과거를 이해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었다. 킬러들의 대결이라는 표면적 이야기 너머에 숙명적으로 얽힌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파과'는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투우가 조각을 향해 보이는 끊임없는 갈망과 집착은 단순한 적대감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감정 선이 '파과'를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닌 심리 드라마로 만들어냈다.
3.청춘의 상처
'파과'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건 16세 전후, 청춘의 시기라고 한다. 영화는 이 시기에 형성된 상처와 트라우마가 어떻게 평생을 따라다니며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지 보여준다. '파과'에서 조각과 투우, 두 인물 모두 청춘 시절의 결정적 경험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중년의 나이에도 아직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공감됐다. '파과'를 보면서 내 청춘의 상처들도 떠올랐다.
민규동 감독은 '파과'에서 액션과 드라마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며 단순한 장르물을 넘어선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펼쳐지는 두 인물의 최후 대결은 영화의 모든 감정과 서사가 응축된 강렬한 순간으로 남는다. 액션 장면들은 화려함보다 현실감과 실용성에 중점을 두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파과'에서 이혜영이 들고 다니는 작은 펜 하나로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들은 킬러의 노련함과 기술적 완성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고독하게 살아온 조각이 점차 타인과 연결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이 '파과'의 감동 포인트였다. 특히 버려진 개를 돌보고, 강 선생과 그의 딸에게 정을 느끼게 되는 모습에서 조각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이런 요소들이 '파과'를 더 깊이 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파과'는 비록 피의 역사를 통해 얽힌 인연일지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그런 희망의 메시지가 '파과'를 단순한 액션물이 아닌, 마음을 울리는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는 122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음악과 영상미도 정말 좋았다. 그리고 '파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폭력적인 장면들조차 어떤 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냥 피가 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한 느낌이다. 구병모의 원작 소설도 궁금해져서 책도 주문했다. 원작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연출과 편집도 정말 좋았다. 상업 영화지만 예술영화적인 감성도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특히 조각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면들의 전환이 자연스럽고 효과적이었다. 민규동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다. 사실 그동안 대형 상업영화에만 익숙해져 있던 내게 '파과'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파과'의 색감이다. 푸른빛이 도는 차가운 색조로 표현된 현재와 따뜻한 톤으로 묘사된 과거 장면들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시각적 요소들이 인물의 감정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줬다. 투우와 조각의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 붉은 조명이 서서히 두 사람을 감싸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파과'는 여성 주인공이 나이 든 캐릭터라는 점에서도 신선했다. 보통 여성 캐릭터는 젊고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틀을 깨고 60대 여성의 이야기를 강렬하게 그려냈다. 이혜영의 연기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녀의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나이가 가진 특유의 카리스마와 깊이가 있었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아직 안 본 사람들은 꼭 보길 권한다. 단, 폭력적인 장면들이 꽤 있으니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하는 분들은 참고하길바란다. 어쨌든 '파과'는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다. 베를린영화제에서도 주목받았다는데 이유가 있었다. 해외에서도 통할만한 한국영화의 저력이 느껴졌달까. 영화관에서 꼭 한 번 봤으면 한다. 이런 감독, 이런 배우, 이런 작품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